깜박, 깜박. 어두웠다 밝아지길 반복하는 시야. 온통 백색 일색인 방은 별다른 조명장치가 보이지 않는데도 늘 빛을 발하는 듯했다. 생각해보니 스스로의 그림자를 본 일이 손에 꼽으니 정말 그랬던 것도 같고.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목적을 잃어버리고, 의지는 닳아서 없어져버릴 낮도 밤도 없고 시간도 세월도 알 수 없는 방. 일정 시간마다 한 번 지급되던 영양제가 무더기로 들어오고, 필요하다 느낄 때마다 하나씩 섭취하며 기약없는 하루를 버티던 날들의 끝.
어떠한 전조도 없었는데 그는 조용히 일어나 앉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오래 전부터 훤히 열려있던 문에서 비로소 연구원과 군인 여럿이 줄지어 들어온다. N구역, 총 1개체 확인. 회수를 시작합니다. 건조한 목소리. 다정하게 잡아끄는 손을 따라 일어서는 다리는 희미하게 비틀거릴지언정 주저앉지는 않았다. 의젓하구나,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네, 알고 있었죠.
초재생이 가능하더라도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아사한다. 그것을 두 번 정도 깨닫고 난 직후였을 것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돼?" 몇 번째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린 것은.
기억에 없는 순간에 무언가를 주사받았든 억지로 먹여졌든 몸에는 최소한의 생명활동을 위한 에너지가 돌아와 있었다. 이곳에 들어온 첫 날에는 벽과 천장을 부수다 전기장 트랩에 의식을 잃었다. 그 다음 날은 수면 가스, 그 다음 날은 총. 그 다음은 로봇이던가? 아니, 드론? 무엇이 막아서든 그와 그것은 맹렬히 날뛰었으나 그 모든 발버둥은 결국 어떠한 소용도 없었다. 며칠인지 몇주인지 모를 투쟁 끝에 기진맥진해 쓰러진 이후로는 식사 대용으로 지급되는 영양제를 거부하는 것으로 의지를 꺾었으나 아무래도 "마지막"조차도 그는 선택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시간을 세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오랜 시간동안 무시하던 허기조차 느껴지지 않기를 또 한참. 끝을 각오하고 감았던 눈이 허무하게 뜨이고 나자 찾아오는 것은 허탈함이었다. 동시에 -도대체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욕지기가 치밀어올랐고 그걸 도로 삼킬 수고를 들이지도 않았다. 대체 원하는 게 뭐냐고 소리소리를 지르고 난 이후에는 다시 지쳐서 쓰러졌고, 그 날은 처음으로 어떠한 탈출 시도도 하지 않고 그저 시간을 때웠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듯이.
하루가 지났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났다. 새삼, 이 방의 벽과 천장에는 희미한 틈 하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가 지났다. 어차피 소용없을 것을 알아서 영양제를 스스로 급여했다.
하루가 지났다.
하루가 지났다.
하루가 지났다. ... 아니 이틀이 지났나?
하루가 지나고, 지나고, 지나고, 지나고, 지나고... ...
나는 버려졌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이렇게까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을 리가 있나? 여기 오기 이전만 해도 하루에 몇 번씩 그들을 만났는데. 몸에 무얼 뽑거나 어디에 집어넣거나 등등등. 불안함을 못 견딘 끝에 움직이지 않는 것을 그만두고 다시 탈출을 꾀하려고 했다.
어떠한 틈새도 찾질 못해서 그저 벽 한구석만을 계속해서 공격하는 날이 이어졌다. 마음껏 날뛰게 해주니 그것은 마냥 신나서 굳건한 벽을 향해 어떤 원리인지도 모르는 (그러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개체가 얼마나 될까?) 공격을 퍼부었으나 그리 즉각적인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여기 들어온 첫날에는 분명 몇 번의 능력으로 부서졌던 것 같은데? 그동안 내가 약해졌나? 그래서 버려진 건가? 하는 생각에 매몰될 즈음에야 금이 간 벽이 무너지고 빛이 들지 않아 어둑한 시야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꺼내줄 때까지 기다리면 된단다." 하는 지시를 기억해낸 것도 그와 동시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야? 출구가 눈 앞에 있잖아.
기다리면 된단다.
그래서, 대체 언제까지... ...
누군가 꺼내줄 때까지.
어둠 앞에 섰다. 한 발짝 내디디려 할 때 머릿속으로 돌아온 그것 때문에, 갑작스레 깨지는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정말 나갈거야? 정말? 정말? 그렇게 묻는 듯한 고통이, 정말? 계속해서 이어졌고, 정말? 그 끝에... ...
있던 자리로 돌아오는 본인의 미래를 알려준다. 불과 몇 초 미래의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뒤돌아서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그는 ... 자연스레 자신이 본 것과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예정된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순순히 의지가 꺾인 그는, 그가 본 미래대로 자리에 돌아왔다. 그것은 틀린 적이 없었다.
물론 감정은 오래 가지 않았고 다만 채 삭여지지 않은 반발심이 그를 다시금 그 앞에 서게 했다. 여전히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을 눈 앞에 두고서 그는 고민했고, 머릿속에서는 다시 그의 미래를 알려주고, 그는 또 돌아오고, 또 기다리다 지친 날이면 다시, ... 그런 촌극이 반복되던 날이 끝난 건, 그가 결국 언제까지나 정체모를 것에 휘둘릴 수 없다고 억지로 결심하고, 그게 자신의 미래라는 것도 착각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직감을 무시하며, 어둠 속으로 한 발자국 내디딘 순간이었다.
작은 몸이 어둠에 파묻혔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AD8251, 나가시겠습니까?
... ...
나가시겠습니까?
"지시"받던 것과 같은 건조한 ... "물음", 아니, 그건 "통보"였을까? 언제나, 매일, 그 차갑고 하얀 방에서 이번에야말로 끝이길 바라며 눈을 감아왔지만 비로소 깨달았다. 여기가 비로소 ... ... "끝"이라는 것을. 그것은 직감이었고 깨달음이자 계시였다.
그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아가지도, 돌아오지도 못하고.
그런 그를 구원하는 속삭임. 머릿속에 그려지는 미래. 다시에 자리에 돌아와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최후의 생존자가 되는 자신을, 다시, 알려준다.
... 돌아갈게요.
느릿한 뒷걸음질. 조금은 떨리는 걸음걸이.
이후로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차피 내 의지는 중요하지 않잖아. 그냥... 그냥 있으면 돼? 그 때부터 생각하는 것도 종종 그만두었던 것 같다. 숨을 쉬고, 눈을 깜박거리고, 밖에 풀어둔 그것은 제멋대로 날아다니다 벽에 온갖 상흔을 남겼다. 며칠, 아니 몇 주가 지나자 벽에서 목소리나 노크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런 의지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몇 주가 더 지나서는 결국 문이 열렸으나, 그 때도 물론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에는 바닥에서부터 물이 차올랐고, 간혹 아무것도 없던 벽에서 드론들이 쏟아져나오고 반대편 벽에 틈이 생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의 눈짓, 혹은 손짓에 따라 움직이는 그것만이 바빴고, 그는 최소한만 움직여 공격을 피하거나 그러지 못하면 재생하기를 반복했지만 그런 일들도 갈수록 줄어들고 끝내는 고요함만이 그를 감쌌다. 이후로는 문이 내내 열려 있어도 그는 그 자리에 존재하기만 했다.
마지막 날, 그러니까 바로 일주일 전, 그들이 직접 그를 데리러 들어올 때까지... ...
셀 수조차 없는 나날들을 주변을 의식하긴 커녕 본인조차 본인을 잊고 지냈으니 초"인류"라는 이름과 달리 사람의 꼴이 아니어서, 전혀 관리되지 못했던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싹둑 잘렸다. 따뜻한 물에 오랜 시간 담갔다 빼니 그제야 평온한 숨을 내쉬고 휴식을 취하다가 연구원이 말을 걸자 가장 먼저 나온 답은 자신의 앞 번호 개체를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역시 다른 구역으로 옮겨졌는데도 다시 만날 것을 확신해온 것처럼. 그와의 관계가 두 개체가 갈라지게 된 이유였던 만큼 누군가는 긴장했을지도 모르고, 코아틀에서 개체들의 "재회"란 정말 드문 일이었으니 누군가는 주목했을지도 모르나, 그런 것치곤 꽤나 덜 호들갑스럽고 덜 요란한 인사가 전부였다. 상대를 마주한 표정은 그 본인만이 보았겠으나,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게 반가워하고 평범하게 안부를 묻는 목소리에는 지나친 점잖음이 있을 뿐 별다르게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포옹이 약간 긴듯도 했으나 연구원 한 명이 호명하자 금세 그만두었으니 "정상범위"로 참작되었다.
다른 개체들을 마주했을 때에도 표정은 변하질 않고, 건조하고 무던한 감정을 웃음으로 감추며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먼저 다가가기 시작한 것은 이틀이 지난 후로, 마찬가지로 어떠한 이상행동 없이, 오히려 높은 수준의 사교성을 보였다. 적극적이지 않은 것만 빼면 완벽하게 "그" 구역의 생존자다운 모습이다.
칭찬하는 말을 몇 번 듣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평가를 받은 후에도 그는 그들을 의식하듯 의젓하게 생활했다. 책을 요청해 읽거나 다른 개체들에게 읽어주기도 하고, 싸움이 발생할 것 같으면 바로 와서 보고하기도 하고, 가끔은 나서서 누군가를 챙기기도 했다. 가끔 개인공간에 혼자 틀어박히는 것만 빼면 흠 잡을 곳 없는 모범적인 행동들.
성격이 너무 바뀐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으나 금방 사그라들었다. 이는 즉 구역이 제 기능을 충분히 했다는 증명이 되므로.
간혹 누군가, "이렇게 잘 말할 수 있는데 첫날에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하고 물어보면, 순순히 "누군가를 마주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렇단다." 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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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 9. 21:00